화교에 관한 고찰
페이지 정보
작성일 23-01-20 22:59
본문
Download : 화교에 관한 고찰.hwp
이에 따라 1883년에는 서울·인천·부산 등 주요도시에 이미 210명의 상인과 111명의 관리가 주재하였고, 1884년에는 서울 30명·인천 235명 등 화교수가 급증하였다. 청나라는 동년 `상민수륙무역장정(商民水陸貿易章程)`, 즉 통상조약을 강요하여 화교유입의 길을 터놓았다.
그리하여 이들은 상업을 천시하던 조선조의 상권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는데, 1923년 조선총독부 통계는 서울·인천의 화교 6,000명이 그간 본국에 송금한 액수를 당시의 일화 1000만 엔(현재의 100억 엔 상당)으로 줄잡고 있음으로 보아 그들의 이익이 막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(data(자료):1983년 중화민국 한국 연구학회 간행 《여한 60년 견문록(旅韓 60年 見聞錄)》 중
순서
설명
화교에 관한 고찰





●화교
다.
레포트/경영경제
화교에 관한 고찰●화교 , 화교에 관한 고찰경영경제레포트 ,
Download : 화교에 관한 고찰.hwp( 81 )
화교에 관한 고찰
,경영경제,레포트
●한국의 화교
한국에 화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1882년(고종 19)으로 추정된다 임오군란 때 한국에 파견된 광둥성 수사제독(水師提督) 우창칭[吳長慶] 휘하 군대를 따라 40여 명의 상인이 입국하였는데 이들이 한국화교의 시초가 되었다. 이어 1884년 인천, 1887년 부산, 1889년 원산에 화상조계지(華商租界地)가 설치됨에 따라 화교수는 인천에만도 1,000명을 넘어섰다.